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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날다'를 연재합니다. ( 5. 하지만, 이제 두려워하는 것을 멈출 때)
  • 문현숙 기자
  • 등록 2023-03-10 10:5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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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지만, 이제 두려워하는 것을 멈출 때


송문희 저자

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현 정치평론가 / 전략문화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5-1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한국에서 여성은 대부분 평범한 삶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를 만큼 많은 성희롱과 성추행을 겪어왔다. 화제작인 『82년생 김지영』을 읽어 보자. 평범한 여성인 김지영은 교육받고 직장생활 하는 30여 년간 숱한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상적으로 겪어왔다. “다리가 이쁘니 치마를 자주 입으라”는 상사와 억지로 블루스를 춰야 했고 허리와 엉덩이를 더듬는 상사의 손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회식 자리에서 “몇 명이랑 자봤어? 지영 씨가 의외로 잠자리에서 적극적인 것 아니냐”고 히죽거리는 남자동료에게 표정을 굳히면 “농담인데 뭘 까칠하게 그러냐”는 조롱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모두 ‘그럴 수 있는 일들’로 쉽게 치부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선 안 된다”,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해지는 일”로 생각하며 김지영은 불쾌한 상황을 참아왔다. 그러면서 모멸감과 상처가 쌓여갔다. 어쩌면 김지영은 이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침묵과 인내 속에서 ‘말없는 소수자’로 남아 있었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문제를 자기만의 것으로 쉬쉬하고 침묵했다. 사실을 폭로하고 난 뒤 어떤 비난과 현실적인 불이익을 받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침묵의 이유였다. 특히 사회적으로 권력이나 영향력이 없는 많은 여성들이 이를 드러내 이슈화하고 문제 제기 하기가 쉽지 않았다. 힘들게 용기를 내어 말해도 “그동안은 왜 말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는다. “그때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피해자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또 대부분의 성범죄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제대로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가해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피해자를 ‘꽃뱀’이나 ‘먼저 꼬리친 행실 나쁜 여우’로 몰아간다. 명예 훼손이나 무고로 역고소를 하기도 한다. 사회 전체에 만연한 피해자를 향한 의심과 비난의 눈초리는 가해자에게는 면죄부를, 피해자에게는 두려움을 줌으로써 성폭력 신고 자체를 포기하게 만든다. 피해자에 대한 이러한 낙인효과 때문에 성범죄 신고율은 매우 낮다. 2016년 여성가족부의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범죄 피해자의 경찰 신고 비율은 2.2%가량에 불과하다. 그만큼 드러나지 않은 범죄가 훨씬 많다.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 받는 경우도 드물다. 전체 성범죄 가운데 형사재판에 넘겨지는 기소율은 높지 않다. 2016년 경찰범죄통계에 의하면 강간 사건의 구속률은 8.74%에 머문다. 2016년 법무연수원의 범죄백서에 따르면 성범죄 중 가장 죄질이 무거운 강간 사건의 경우도 기소율이 52.62%에 불과하다. 성범죄 용의자 대부분이 구속되지도 않고 절반이 불기소로 풀려나는 것이다. 성범죄자가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신고할 동인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더 빈번한 성폭력 범죄 발생의 원인이 된다. 피해자의 법적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피해자 조력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않는다면 성폭력 피해 여성이 국가와 사회를 신뢰하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열악한 상황에서 결코 ‘괜찮지 않은’ 수많은 피해 여성들은 목소리를 낼 엄두를 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현직 여검사가 온 국민이 보는 전국 방송에 나와 검찰 내 성추행을 폭로했다. 한국판 미투 운동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현직 여검사라는 점은 주목할 지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모두 갖고 있는 검사조차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 이건 단지 나의 문제만이 아니었어, 여자라면 누구든 당할 수 있는 부당한 폭력이었어!”라고 자각하기 시작한 여성들은 이후 함께 용기를 내어 미투 폭로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이 높은 사람이 문제 제기를 하니 그제야 관심이 높아지는 것 역시 어쩌면 불공정한 현상일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용기 있는 행동이 그동안 숨겨져 있던 어두운 장막을 걷는데 기여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도 2003년부터 ‘성폭력 피해 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열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사회적 인식을 바로잡고 적극적인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표이다. 아직도 자신의 피해를 말하지 못하고 혼자 힘들어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유해야 하는 책임이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애써 남의 일로 외면하고 살기엔 너무도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타인도 나의 고통에 마음을 열어주지 않겠는가?


연출가 이윤택의 성폭력 피해자인 홍00씨는 “왜 이제야 말하느냐 묻지 마시고… 이제라도 말해줘서 다행이라고 말해주세요. 주목받고 싶었냐고 묻지 마십시오. 이런 일로 주목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용기 내어 주세요. 잘못한 이는 벌을 받고 희망을 품은 이는 기회를 맞을 수 있게 노력하고, 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라고 호소했다.


힘들게 말문을 여는 성폭력 피해자를 향해 “너도 잘한 것 없네.”, “왜 너만 유별나게 난리야?”라는 냉소적인 비난의 눈초리를 거두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말해 줘서 고맙다”, “네 잘못이 아니야”, “함께 해결해 보자”라고. 그리고 피해자에게 던지는 온갖 짜증스러운 질문을 가해자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고 동석한 자리에서 불쾌한 상황에 처한 여성을 볼 때 우리는 함께 “NO”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잘못된 권력의 전횡을 방치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함께 이 사회의 적폐들을 쓸어내야 한다. 이제 우리 사회가 미투 운동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응답을 할 시점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본인의 감정에 충실하고 원치 않는 성추행 상황에 부딪혔을 때 “NO”라고 크게 외칠 수 있도록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 성추행의 피해는 결코 수치스러워하며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중대한 인권 침해이며 단죄해야 할 범죄라는 사실을 가르쳐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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