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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평범한 악을 조심하라
  • 박은희 기자
  • 등록 2023-10-26 13: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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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부록- 고려 대학생들이 보는 미투 운동


송문희 저자

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현 정치평론가 / 전략문화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적극적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반복할수록 약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 C. 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한나 아렌트라는 학자는 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우리는 악이라는 실체가 우리의 일반적인 사유 및 가치 체계와 철저히 배격되는, 누가 봐도 ‘평범하지 않고 비정상적인’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악이란 건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고 별 생각 없이 행해진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제3자의 눈에는 너무나도 사악하고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행위들이,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체질이 되어 스며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 둘 간에는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큰 파장과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미투(#Me_too) 운동은,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평범해진 악을 들춰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악이 얼마나 평범했으면 지금에 와서야, 사회적 운동의 형식을 띄어야만 이렇게 고발될 수 있었던 것일까?’라는 한탄스러운 반문도 가능하다. 현재 시점에서 밝혀지고 있는 성희롱/성추행/성폭력 사건들의 양과 내용을 보면 실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지금까지 덮어져 왔다는 사실은 더더욱 충격적이다. 이제 와서야 이 사건들이 밝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성폭력이라는 범죄 행위가 가지는 ‘구조적 폭력성’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현재 드러나고 있는 개별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두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성폭력이라는 행위는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맞서 싸울 수 없는, 다층적인 권력 구조가 얽힌 범죄이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젠더 권력’이다. 젠더 권력이란 남-녀라는 젠더의 차이가 각 젠더가 지닌 힘의 차이로 이어지는 불균등한 구조를 말한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편견이 고정되어, 이로 인해 한쪽 성이 다른 쪽 성에 비해(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불이익을 보게 되는 현상들은 아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우리 사회에 아주 뿌리 깊게 고착화되어 있다. 하지만 성폭력에는 이러한 젠더 권력 외에도 아주 다양한 형태의 권력 관계가 관련된다. 신체조건, 나이, 직급, 경제적 우월성, 정치/종교 권력 등의 구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가해자가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이용하여 피해자에게 “무사히” 성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이를 더욱 강화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방관하면서 묵시적으로 가해자의 편에 서는 주변 사람들의 존재이다. 이런 수많은 구조적인 힘들이 성폭력이라는 ‘범죄’가 ‘무탈하게’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여성들은 그동안 그들이 겪은 일상적인 성희롱/성추행/성폭력을 밝히고 그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것 자체에 대해 큰 부담을 느껴 왔고, 지금도 느끼고 있다. 자신이 당한 피해를 밝혔다가는 당연히 말해져야 될 것이 말해지지 못하도록 하는, 여성의 인격적 존엄을 무시하고 그들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묵인하는, 이런 폭력적인 환경 전체와 싸워야 되기 때문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는 순간, 경찰서에 가서 자신의 피해 현장을 생생히 떠올리며 그대로 증언해야 되며, 강압적으로 혹은 보상적으로 사건을 무마하려는 가해자의 시도들을 일일이 상대해야 하며, ‘조금 더 조심하지 그랬니’라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2차 가해를 당하게 될 수도 있고, 법정까지 갔을 경우 2-3년 동안은 공방을 벌여야 될 수 있다. 이렇듯 개인이 사회 구조와 싸운다는 것은 그 개인에게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래서 여성들은 지금껏 이 문제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하도 숨기다 보니, 사회와 더불어 자신들도 그게 문제라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채 살게 되었던 여성들도 있을 것이다.


미투 운동은 이렇게 여성들이 개인의 힘만으로는 상대할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구조적 폭력에 대해 반발하고 그것을 고발할 수 있는 사회적 플랫폼을 제공한다. ‘너만 그런 일을 당한 게 아니라 나도 당했어. 그리고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목소리를 내어 말함으로써, 성폭력 피해자들은 이러한 범죄들을 ‘평범’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에 맞서서 자신 또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그런 용기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정상화’된 범죄 행위들을 다시금 ‘비정상’의 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는 힘이 조직된다. 미투 운동은 이렇게 개인이 당한 피해를 고발하는 것을 넘어 피해자를 양산하는 사회의 폭력적 인식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아낼 수 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사회적 변혁을 위해서 중요한 점을 세 가지만 짚고 싶다. 첫 번째로는, 여성들을 피해를 당한 ‘피해자’로서만이 아니라, 성적 폭력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 제기를 하는 ‘주체’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언론에 의해 미투 운동이 그려지는 모습을 보게 되면 때때로 아주 선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여성들이 지금까지 숨겨왔던 비밀을 마침내 폭로하는 듯한 이미지가 부각되어, 폭로의 대상이 되는 남성들이 ‘범죄자’보다는 그저 운 나쁘게 걸려든 사람들로 간주될 위험성이 있다(피해자들이 ‘꽃뱀’이라는 비속어로 호명되는 현상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들을 주체적인 문제 제기를 하는 행위자가 아닌, ‘불쌍하고 (혹은 불쌍한 척 하는)수동적인 피해자’라는 틀에 가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4월 4일, 고려 대학교에서 열렸던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에서 ‘예은이 아빠’ 유경근 씨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피해자다워야 한다’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피해자면 슬퍼하면서 가만히 좀 있지, 뭘 시끄럽게 자꾸 더 하려는 거냐?” 미투 운동의 참여자들에게도 이와 동일한 틀이 씌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은 깨져야 한다. 여성들을 수동적인 피해자의 위치에 고정시켜 놓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문제 제기자’들로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에 미투 운동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두 번째, 미투 운동에서 문제되고 있는 구조적 폭력에 대해 모든 사회 구성원(특히 남성들!)은 책임 의식을 지녀야 한다. 나치의 만행에 대해 독일 국민들은 모두 책임 의식을 느끼고 반성한다. 모든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그 대량 학살이 가능했던 것에는 ‘악’이 ‘평범’한 것이 되도록 방치한 독일인 일반의 무지도 한몫 했다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서 젠더적 폭력이 가능했던 것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폭력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남성들의 경우(많은 여성들도 마찬가지이다), 학창 시절에 한 번씩은 무심코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성적인 농담을 해 봤거나 그에 맞장구치며 웃고 동조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그 일들이, 지금은 부끄럽게 느껴지고 옳지 않다는 인식이 도달한 사람이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시의 그러한 행위들이 지금의 미투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고 통감해야 할 것이다. 이는 모든 남성들이 ‘잠재적 성범죄자’라는 말이 아니다. 또 ‘무고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말도 아니다. 2~3%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이 성범죄의 혐의를 뒤집어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 다만 법적인 처벌의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우리 사회 전체의 성윤리와 젠더 의식을 재고해 보고, 그것을 만들어가는 한 주체적인 구성원으로서 ‘나’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연결해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을 직시하고, 대화를 통해 이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페이스북에서 ‘예쁘다’라는 표현이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라는 문제 제기를 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정말 다양한 의견들과 논쟁이 오갔다. 어떤 이들은 이 의견에 동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칭찬마저 못 하게 만드는 사회가 되어간다며 반발하고 탄식했다. 이 논쟁을 보면서 참 생각이 복잡해졌지만, 결국에는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말을 하는 사람의 의도와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논의가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각자가 느끼는 불편함의 기준선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이 말해질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말을 한 사람도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말을 들은 사람도 불편함을 표현하지 않고 쌓아두게 되는(혹은 그 자신도 불편함이 익숙하고 무뎌지는) 결과가 생기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힘들고 번거로울지라도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터놓고 대화로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성숙한 젠더 의식이 형성되어 가고, 성평등의 가치가 조금씩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회피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점점 우리 사회는 문제를 느끼지도 못하는, 무감각한 사회로 회귀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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