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지만, 이제 두려워하는 것을 멈출 때
송문희 저자
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현 정치평론가 / 전략문화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5-7 직장 내 미투
한국 사회는 87년 체제 이후 많은 분야에서 민주주의를 단기간에 발전시켜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여성인권 분야는 좌우,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발전 속도가 느렸다. 한국 사회는 남성의 성범죄나 성폭력 문화에 비교적 관대한 경향이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오랫동안 상처와 분노, 불안을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왔다.
지금의 미투 운동은 단순히 성 대결이나 남녀 간의 성적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성폭력은 바로 ‘권력관계’에서 발생한다. ‘약자’인 여성에 대한 비하에 여성의 몸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맞물리는 지점에서 독버섯처럼 생기는 폭력인 것이다.
“가해자가 힘을 가진 사람이라, 상사라 어쩔 수 없었다”, “직장에 나쁜 소문을 퍼뜨려 매장시킬까 봐 말하지 못했다”는 피해자들의 호소는 대체로 엇비슷하다. 이렇게 권력자인 남성이 약자인 여성 위에 군림하며 억압해온 것이 우리 사회 성폭력의 본질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관심을 끄는 유명인들과 달리 일반인들의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의 경우는 미투 폭로로도 사회적 반향이나 주목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직장 내 권력형 갑질을 견제할 ‘노동조합’이란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노조가 없으면 문제가 있어도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직장 현실을 감안한다면 노조를 통한 대응이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최근 직장 내 성폭력 문제에 대응하는 노조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2016년 산별중앙교섭을 통해 ‘의료기관 내 폭력 근절을 위한 매뉴얼’을 도입한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좋은 사례이다. 위의 매뉴얼에 의하면 보건의료노조의 지부가 있는 170여개 병원은 직장 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인지하면 곧바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야 한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에겐 ‘유급보호휴가’가 주어지고 필요한 상담 치료도 지원받는다. 조사 결과에 따라 징계 위원회를 여는 한편 피해자가 여럿일 경우엔 해당 부서에 대한 실태 조사도 벌인다.
여성 노동자가 많은 사업장에 노조를 만들면 특히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막아달라는 민원부터 제기되는 일이 많다. 이것은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이 사내 권력 구조와 관련된 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지와 능력이 있는 노조는 피해자와 함께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어 이런 문제들에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직장 내 성폭력 사건 발생 때 노사가 함께 진상 조사 위원회와 징계 위원회를 꾸리는 경우라면 피해자 구제는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