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지만, 이제 두려워하는 것을 멈출 때
송문희 저자
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현 정치평론가 / 전략문화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5-3 우리가 만든 괴물
최영미 시인은 계간지 ‘황해문화’에 문단 내 성추행을 고발하는 ‘괴물’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했다.
괴물/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황해문화〉, 2017 겨울호
최영미 시인의 고발은 문단 내에서 오랫동안 묵혀왔던 것이 곪아 터져 나온 것이다. 문단 내 등단을 두고 파생되는, 문단 권력의 갑질에 대해 문단 안팎의 사람들은 대부분 새로울 것도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동안 침묵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더 큰 이익을 얻거나 불이익을 회피하기 위해 잘못된 구조를 묵인하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그 구조의 일부가 되어 간다.
괴물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괴물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너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이에 동참했을지도 모른다.